Hyper/Text

테크와 미디어, 그리고 컬처 관련 고품격 콘텐츠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을 다시 읽다


국내 프로야구 팀들 사이에 ‘오대산 극기 훈련’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겨울에 얼음을 깨고 들어가는가 하면, 절벽 외줄타기를 통해 담력을 키우기도 했다. 특히 하위팀 중에는 이런 산악훈련을 통해 효과를 본 팀들도 꽤 있었다.

과학적인 훈련시스템으로 무장한 요즘 기준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따금씩 과학의 영역을 뛰어넘는 게 바로 정신력이다. 프로야구팀들이 ‘오대산 극기 훈련’을 통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 역시 이같은 대목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오대산 극기 훈련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만화가 있다. 바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프로야구팀들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대산 극기 훈련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얘기가 한 때 꽤 유행했다.)

gongpo‘공포의 외인구단’은 웅숭 깊은 작품이다. 만화라고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치는 작품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모습은, ‘성배(Holy Grail)’를 테마로 한 중세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는 다소 통속적이다. 엄지란 한 여자를 둘러싸고 오혜성과 마동탁이 벌이는 줄다리기란,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뻔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우선 오혜성(일명 까치). 그는 인간의 한계를 곧잘 뛰어넘는다. 외인구단의 손병호 감독은 ‘사람이 성격이 모나든, 능력이 뛰어나든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이 놈은 곧잘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말로 까치를 평가한다. 오혜성은 끝은 ‘사랑’이다. 사랑 외에는 끝이 없다. 그는 사랑하는 엄지를 위해 최고의 야구선수가 되었지만, 엄지가 인정하지 않는 승리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대단한 기록마저 쉽게 포기해 버린다. 한국시리즈 승리라는 팀의 목표마저,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오혜성은 ‘너무 순수하고 어리숙해서, 오히려 무서운 인물’이다. 그에겐 애시당초 얄팍한 계산이라는 것은 스며들 틈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꿈을 향해 매진하는 생활만 있을 따름이다. 이런 오혜성의 모습에서 초기 벤처인들의 열정을 읽었다면, 내가 너무 ‘통속적’인 것일까? 스톡옵션이니, 대박이니 하는 것들을 모르던 시절, 허름한 사무실 뒤켠에서 야전침대에 의지해 생활하던, 눈매 초롱초롱한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이런 순수한 열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오혜성의 라이벌 마동탁. 프로야구 최고의 강타자이자, 우승팀 유성의 간판. 그는 무엇보다 타고난 승부사이다. 그런가 하면 100게임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던 날, 다소 낭만적인 프로포즈를 통해 엄지와의 결혼에 성공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타고난 재능에다, 끝모르는 성취욕이 결합된 인물이다.

오혜성이 어리숙한 면이 있는 인물이라면, 마동탁은 철저한 승부사다. 그는 오혜성에 비해 다소 모자란 재능을, 특유의 승부 근성으로 보충한다. 만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필살 타법’은, 그가 승리를 위해선 어떤 수단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승리를 위해선, 사랑마저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랑을 희생한 대가로 승리를 쟁취한 마동탁은, 모든 걸 버리고 사랑을 구한 까치에게 결국 패배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지지 않았다.

“결국은 네가 이겼다. 하지만 결코 내가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넌, 네가 원하는 바를, 난 내가 원하는 바를 서로 차지했을 뿐이다. 똑같이 귀중한 존재 하나씩을 잃어가면서…”란 그의 마지막 독백은, 그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해준다.

그리고 엄지.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캐릭터다. 순수하기 때문에, 더 나약한 인물이다. 까치를 사랑하면서도, ‘100게임 연속 안타’를 때리며 구애한 마동탁을 뿌리치지 못한다.

‘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는 까치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마동탁의 극적인 구애를 이겨내지 못한다. 나약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지나 마동탁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내면에 감춰진 모습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때 마침 시작된 프로야구 붐을 타고 1980년대 내내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 이 작품이 던졌던 화두는, 암울했던 1980년대를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탈출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

요즘 프로야구에서 유행하는 수비 시프트의 원조나 다름 없는 외인구단의 필살수비 모습.

요즘 프로야구에서 유행하는 수비 시프트의 원조나 다름 없는 외인구단의 필살수비 모습.

수원대 이주향 교수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천둥처럼 사납고 송곳처럼 날카롭고 눈덩이 처럼 자가발전하는 무서운 열정. 무엇보다도 자신이 다치는 열정’을 읽었다고 고백했다. 그 열정을 뒷받침하는 목적의식이 다소 약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만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탓할 대목만은 아니다.

뜨거운 열정을 찾기 힘든 요즘, ‘공포의 외인구단’이 형상화해낸 열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덧글) 요즘 메이저리그 뿐 아니라 국내 야구에서도 ‘수비 시프트’를 즐겨 쓴다. 이를테면 보스턴 레드삭스 왼손 강타자 데이빗 오티스가 나올 경우 상대팀 2루수는 거의 우익수 바로 앞까지 가서 수비를 한다. 그런데 오티스가 친 공은 기가 막히게 그 쪽으로 날아간다. 수비 시프트는 일종의 빅데이터 분석 산물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에서 수비 시프트의 원조는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필살 수비다.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정보

이 엔트리는 5월 16, 2014에 님이 Culture에 게시하였으며 , , , 태그가 지정되었습니다.

내비게이션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