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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KBS, 그리고 술 익는 마을- 어느 기레기의 넋두리


1. 술 익는 마을과 팍팍한 삶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 전문이다. 또 다른 청록파 시인이었던 조지훈의 ‘완화삼’에 대한 답가 형식으로 씌어진 이 시는 한국 서정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명작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들 중, 입에 착착 달라붙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하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다. 특히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이란 문구가 주 타깃이 됐다. 저 시가 쓰여진 일제 말기에 술 담아 먹을 쌀이 어디 있었냐는 게 이 시 비판론자들의 주된 논점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문학은 문학으로 받아들여야지, 야박하게 따져서야 되겠냐는 소릴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문학은 곧 삶의 기록 아니냐? 대체 저 무렵 술 익는 마을이 어디 있었단 말이냐?”고 따져 물으면, 또 그 말도 옳은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론 아름답고 멋진 얘기도 어울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 그래서일까? “지옥에서 가장 깊은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의 몫이다”는 단테의 금언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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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 시대 문인의 슬픈 자화상 

1945년 12월. ‘문학자의 자아비판’이란 좌담회가 열렸다. ‘친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가 당시 좌담회의 당면 과제. 하지만 무려 36년이나 계속된 일제 시대를 거쳐오면서 ‘친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면에선 ‘해방전후’로 유명한 이태준은 제법 떳떳할 수 있었다. 일제 말기 그는 분연히 붓을 꺾는 용기를 보여줬던 것. 그러니 당연히 자아비판 자리에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김윤식 선생이 쓴 ‘해방공간의 문학’이란 논문에 따르면 이태준은 “조선어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쉽사리 일본말에 붓을 적시는 사람을 원망했다”고 공격했다. 이쯤 되면 많은 문인들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제대로 들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이 때 김사량이 마이크를 잡는다. 김사량은 일본어로 소설을 쓴 뒤 ‘아쿠다카와 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재주꾼.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만약 표면에서는 붓을 꺾었으나 그래도 골방 속으로 책상을 가지고 들어가 그냥 끊임없이 창작의 붓을 들었던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앞에 모자를 벗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김윤식 ‘해방공간의 문학’ 중에서

‘친일’이란 변수를 빼면 일제 암흑기 문인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붓을 꺾는 일 2) 골방에서 계속 창작을 하는 일 3) 일본어로 쓰되, 최소한의 협력을 함으로써 계속 쓰는 일.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이 중 2번의 대표 주자로 황순원이나 박두진 같은 작가를 꼽고 있다. ‘독 짓는 늙은이’를 비롯한 황순원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있었기에, 한국 문학이 일제 암흑기에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 김윤식은 진단한다.

3. 박목월, 이태준 vs 김사량, 그리고 나 

요즘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죄의식 때문에 페이스북에서 ‘행복 코스프레’를 도저히 못 하겠다는 분들도 적지 않다. ‘좋아요’ 하나 누르려 해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는 이도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란 케케묵은 문구가 어색하지 않은 요즈음이다.

반성문을 쓴 KBS 기자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또 다시 많은 기자들이 쉽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착잡하다. 그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라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난 왜 일제 시대 한국 문학을 떠올렸을까? 난 왜 새삼스럽게 이태준과 김사량이 격론을 벌인 기록을 뒤적였을까?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 특유의 ‘자기합리화’ 때문이었을게다. 아마도.

이쯤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자. 최근 블로그를 새로 만들고 이런 저런 글들을 올리면서, 조금 불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요리 조리 따져보다가 박목월을 떠올리게 됐다. 어쩌면 내가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많은 글들이, 일제 말기에 씌어진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와 다를 것 없겠단 데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

그런데 생각의 고리는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다. 한 때 문학 언저리를 맴돌던 시절에 읽었던 글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게 바로 이태준과 김사량이 ‘자기비판’이란 명목하에 벌인 설전이었다. 그러면서 난 ‘그래도 골방에서 뭔가를 쓴다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라는, 어설픈 자기 합리화에까지 이르게 됐다.

4. 세월호와 KBS-MBC, 그리고 언론 생각 

최근 한 두 달 사이에 언론이 바닥을 드러낸 것 같다. 하기야,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언론은 그 전에도 여러 가지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하지만 온 나라를 뒤흔든 세월호 사건 이후 언론이 보여준 모습은 “더 이상 저대로 방치해둬선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 제기되는 우려 섞인 목소리들을 종합하면 그렇단 얘기다.

자, 이럴 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소시민적이고, 또 자기 앞 길 개척하기에도 빠듯한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내 존재를 건 고민을 할 주변머리는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하고 살 용기는 더더욱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겐 뭔가 자기합리화를 할 구실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골방으로 책상을 가지고 들어가 끊임 없이 창작의 붓을 들었던 이가 있다면, 그 앞에 모자를 벗지 않을 수 없다”는 김사량의 항변이 가슴 깊숙이 박혀 왔다. 아마도, 내 도피처로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을 게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 때문이다.

김사량을 빌어서, 그리고 탁월한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였던 김윤식 선생의 이론을 빌어서, 난, 이렇게 주장하려 한다. 암흑의 시대에도 골방 속에서 삶의 근본, 저널리즘의 근본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성찰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적지만, 그들이 기여하는 몫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때론 뜬금 없어 보이더라도, “암흑 시대에 웬 술익은 마을 타령?”이라고 타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급한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일도 꽤 있기 때문이다.

5. 그리고 남은 글- 박목월 선생을 위한 변명 

끝을 맺어야 하는 데, 스스로 떳떳질 못하니, 글이 자꾸 길어진다. 서두에 난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에서 느낀 불편함을 토로했다. 혹시 오해를 할까봐 이 말 한마디는 꼭 덧붙여야겠다.

내가 박목월 선생 시 얘기를 꺼낸 건, ‘암울한 시기에 한가한 시나 짓던 선생’이라고 타박하려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얘기, 거룩한 얘기도 때를 잘 못 잡으면 잡설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길 하고팠다.

또 하나. 박목월 선생의 시가 꼭 분위기 잘못 맞춘 작품이란 얘길 하려던 건 아니었다. 어찌보면, 박목월 선생도 그 무렵 ‘골방 속에서’ 먼 훗날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한국의 자연을 꿈꾸고 있었을 지로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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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엔트리는 5월 25, 2014에 님이 Culture에 게시하였으며 , , , , 태그가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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