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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끼기와 큐레이션, 그 위험한 곡예


얘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움베르토 에코 얘기를 먼저 해 보자.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막 대중화되던 무렵.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막 창간됐던 ‘이매진’이란 잡지에서 인터넷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읽게 됐다. 그 논문에 움베르토 에코 얘기가 나왔다.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움베르토 에코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우리에겐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움베르토 에코는 뛰어난 기호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인터넷으로 자료 찾는 걸 포기해야만 했다. 자기가 쓰려는 논문과 관련된 자료들이 1만 건 이상 검색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가, 도서관에 자료를 찾으러 가야만 했다고 털어놨다.
에코 이야기는 당시 막 인터넷에 관심을 갖던 내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렵 에코가 겪었던 일화는 (요즘 이야기하는) 큐레이션 개념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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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이란 이름의 만병통치약 

너도 나도 큐레이션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 역시도 큐레이션이란 개념이 중요하다는 사실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도대체 큐레이션이 뭐야?”란 의구심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걸 제어할 수가 없다.
도대체 큐레이션이 뭘까?
내가 이해한 바로는, 큐레이션은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자료 중에서 의미 있거나, 볼만한 것들을 골라주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미술관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들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관객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을 사오기도 하고, 또 그 작품에 대해 설명도 해주는 역할. 인터넷 상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신종’ 큐레이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큐레이션 설명하는 글들을 보면 꼭 따라붙는 전제가 있다. 큐레이션은 단순하게 모아주는 것(aggregation)과는 다르다. 그 얘긴 뭔가 철학이나 관점을 갖고 선별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큐레이터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이전에 우리가 얘기했던 ‘news aggregation site’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나도 큐레이션 비슷한 개념이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최근 인터넷 뉴스 시장의 헤게모니가 ‘생산자’에서 ‘유통업자’로 넘어간 상황 역시 이런 생각을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앞에서 소개했던 에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볼만한 자료를 잘 선별해서 소개해준다면 더 없이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aggregation이고, 어떤 부가가치를 더해야 curation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말씀이다.

인용과 짜깁기

여기서 잠시 논문 얘기를 해 보자. 논문은 선학들의 어깨 위에 살짝 올라서는 행위이다. 무슨 말인가? 상당 부분은 다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는 걸로 채워진다. 선행 연구 고찰, 이란 명목으로 다른 학자들의 앞선 연구를 요약 정리하는 부분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런 인용과 ‘짜깁기’의 차이는 뭘까?
난 인용과 짜깁기의 차이는 ‘자기 만의 스토리텔링’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얘기인가? 자기가 주장하려는 바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론을 소개하는 게 인용이라면, 짜깁기는 그런 자신만의 스토리텔링(혹은 이론?) 없이 그냥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나열하는 게 짜깁기라고 생각한다.
이 차이는 큐레이션과 애그리게이션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다. 큐레이션이란 단순히 이 사람, 저 사람의 글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통찰이 있고, 또 맥락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않을 경우엔 큐레이션을 빙자한 ‘베끼기’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큐레이션과 관련한 글 하나를 참고해보자. 미술관에서 일하는 진짜 규레이터가 쓴 You Are Not a Curator, You Are Actually Just a Filthy Blogger 란 글이다. 큐레이터인 이 글 필자는 자기 표현 수단으로 큐레이션이 창작(creation)을 대체하고 있다는 표현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큐레이션, 큐레이션 하지만, 결국 당신네들은 그다지 실체 없는 존재들이란 것이다.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Call it what you like: aggregating? Blogging? Choosing? Copyright infringing sometimes? But it’s not actually curation, or anything like it.

그럼 대체 큐레이션은 뭘까? 제대로 된 큐레이션을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니먼저널리즘랩에 실린 This Week in Review: Politics, gender, and digital innovation at The New York Times란 글이다. 한 주간 나온 글 중 읽을만한 것들을 모아서 소개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단순히 모아주는 게 아니다. 뉴욕타임스질 에이브럼스 편집국장 해고 관련한 주제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성에 따라 관련 글들을 링크해준다. 이런 게 제대로 된 큐레이션이다.

큐레이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니먼저럴리즘 랩의 글 한 편.

큐레이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니먼저럴리즘 랩의 글 한 편.

요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큐레이션이란 명목 하에 남의 글을 대충 짜깁기하거나, 무차별적으로 가져다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제대로 링크를 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정말 그냥 남의 글을 아무런 맥락 없이 모아놓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것 자체도 의미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땐 큐레이션한다는 말을 쓰진 말았으면 좋겠다.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큐레이션이 대단히 훌륭한 말이란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큐레이션이란 그럴 듯한 외래어로 무단 표절 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짓만은 하지 말자는 의미다.
어쨌든, 이 글은 애초에 큐레이션에 대해 깊이 있는 담론을 담아내려고 시작한 건 아니다. 솔직히 나는 큐레이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냥 앞에 적은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런데, 요즘 큐레이션이 좀 각광을 받으면서, 큐레이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은 채, 대충 다른 사람들이 쓴 글들 중에 입맛에 맞게 몇 가지 소개하면서 큐레이션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난 그런 장면이 부담스럽고 싫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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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엔트리는 5월 28, 2014에 님이 Media, Tech에 게시하였으며 , 태그가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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