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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메소니에와 기로에 선 기자들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했던 에른스트 메소니에라는 화가가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한 ‘프리트란트’ 같은 걸작으로 유명했던 화가.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했던 외젠 들라크르와가 ‘우리 시대 최고 거장’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참고로 들라크르와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을 남긴 뛰어난 화가다.

메소니에의 최대 강점은 ‘사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탁월한 능력이었다.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그려낼 줄 알았던 그는, 당대 최고 화가로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대표작 중 하나인 ‘프리트란트’에 나오는 말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듯한 사실감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고 한다.)

메소니에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의 시대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9세기 말 혜성처럼 등장한 사진술 때문이었다. 사진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특별한 능력으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사진술이 보급되고 난 뒤엔 상황이 달라졌다. 주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건, 이젠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사진술이 대중화되면서 메소니에의 또 다른 허점이 드러났다. 당대 최고라는 그의 ‘육안 관찰 능력’이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달리는 말을 카메라로 찍은 결과 메소니에가 맨 눈으로 보고 그린 그림에 나오지 않는 장면들도 찍혀 있었던 것. ‘육안으로 본 뒤 그리는 능력’은 당대 최고였지만, 기계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했던 셈이다. 충격을 받은 메소니에는 그 뒤부터는 서 있는 말만 그렸다고 한다.

한 때 프랑스 화단의 대표주자로 군림했던 메소니에. 사진술의 발달과 함께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 때 프랑스 화단의 대표주자로 군림했던 메소니에. 사진술의 발달과 함께 뒷전으로 밀려났다.

앞에서 나는 들라크르와가 메소니에를 경의의 눈으로 바라봤다는 얘길 했다. 들라크로와는 또 이런 얘기도 했다. “우리들 중에선 메소니에가 가장 오랫 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사진술만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들라크르와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됐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술이 대중화되자 그냥 사물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메소니에의 능력은 더 이상 희귀한 재능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자, 이제 질문. 들라크르와와 메소니에. 둘 중 어떤 사람의 이름이 귀에 익은가? 메소니에란 화가의 이름을 안다면, 정말로 미술에 엄청난 조예가 있거나, 아니면 취향이 좀 독특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물을 해석했던 들라크르와는 19세기 프랑스 낭만파의 대표주자로 대접받고 있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들라크르와의 그림은 한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반면 메소니에는 어떻게 됐을까? 19세기 프랑스 미술을 다룬 2권짜리 두툼한 책 그 어디에도 메소니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도 20세기 들어 홀에 설치돼 있던 메소니에 조각상을 철거해버렸다. 더 이상 전시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갑자기 미술 얘기를 해서 많이 당황하셨죠. 저도 당황했답니다.

위에 소개한 얘기는 미셸 스티븐스의 책 ‘비욘드 뉴스’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당연한 얘기지만, 스티븐스가 저 얘기 꺼낸 건 미술 지식 자랑하기 위한 게 아니다. 현재 기자들이 처한 환경이 딱 메소니에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 사실을 정확하게 재현했던 메소니에가 사진술의 등장과 함께 몰락한 것처럼,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에다 스마트폰까지 등장한 상황에선 기자들의 경쟁 포인트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그 부분만 그대로 옮긴다.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오늘도 보도자료 열심히 옮기느라 손가락 쉴 틈 없는 기자들이 이 글을 읽고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라는 의미로.

오늘날의 기술, 특히 최근 20년 사이에 소개된 기술들이 현안에 대해 힘들게 정보수집하는 활동에 대해 똑 같은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독자들은 블로그, 이메일, 트위터를 통해 뉴스 가치가 있는 사건에 대한 최초 보도를 받아볼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 사건이 이제 막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경우에 따라선 동영상이나 실시간 카메라를 통해 그 사건들을 직접 ‘관찰’할 수도 있게 됐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술이 전통 뉴스 보도와 벌이고 있는 게임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 아닐까? 독자들이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 알아내는 것을 더 수월해짐에 따라 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얘기해주는 활동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 아닐까? 다른 말로 하자면, 신기술들은 많은 전통 저널리스트들이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저널리즘의 품질에 대한 관점, 즉 증언을 청취하고 파고들며 뉴스원을 발굴하고 확인하는 행위에 대한 숭배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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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메소니에와 기로에 선 기자들”에 대한 1개의 댓글

  1. 핑백: 로봇 저널리즘은 ‘기레기’를 대체할 수 있다 | Hyper/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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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엔트리는 6월 19, 2014에 님이 Media에 게시하였으며 , , , 태그가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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