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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성 기사 시대, ‘에버그린 콘텐츠’는 힘든 걸까?


1970년대 한 주부가 있었다. 그는 시장 볼 때마다 자신이 산 물건들을 꼼꼼하게 적었다. 콩나물 얼마, 두부 한 모 얼마. 그렇게 10년 가까이 가계부를 적었다. 그는 가끔 가계부를 뒤지면서 “한 모에 100원 하던 두부는 10년 사이에 이렇게나 올랐구나. 콩나물 값은 의외로 큰 변화가 없네?” 하는 소릴 혼자서 했다.

그 무렵 정부에선 물가지수라는 걸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자료가 없었다. 특히 생활물가지수 쪽이 더 심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부 관계자가 이 주부 얘길 알게 됐다. 그래서 협조를 받았다. 10년 이상 꼼꼼하게 적었던 가계부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료가 됐다. 신문을 아무리 뒤져도 얻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정보. 그래서 그 주부는 한국 근대화 초기 물가지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같은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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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와 콘텍스트, 가깝고도 먼 거리 

저 얘기의 진위 여부는 나도 잘 모른다.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충분히 가능한 애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계부나 물가지수 얘길 하려는 건 아니다. 어제 정말 똑똑한 몇몇 분들과 CMS와 언론의 혁신이란 주제로 공부를 했다.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생생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덕분에 내 귀도 호강을 좀 했다.

모임이 끝날 무렵 어떤 분이 한 마디했다. “한국 언론의 기사들은 너무 휘발성이 강하다. 이젠 영원한 생명을 갖는 콘텐츠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나도 100% 동의한다. 사실 나도 몇 년 전부터 ‘영원한 생명을 갖는 콘텐츠,’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 표현대로라면 에버그린 콘텐츠(evergreen contents)에 대해 고민을 했다.

3년 쯤 전이었던 모양이다. 글로벌리서치센터장이란 직책을 맡은 직후 회사에서 각 부서 사업계획을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때 이런 얘길 했다. “여러분들은 휘발성 강한, 전투적인 기사 열심히 쓰시라. 나는 늘 푸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그래서 처음 몇 달 간 노가다를 좀 했다. 흩어져 있던 IT 관련 통계를 한 데 모아보자는 야심을 갖고 덤벼들었다. 물론 대단한 통계는 아니었다. 기업들이 수시로 발표하는 자료들을 그래프로 만들어 저장하는 작업. 조금만 뒤지면 널려 있는 자료들을 한번 모아보자는 야심을 갖고 덤벼들었다. 두 어달 동안 열심히 작업을 했다. 가끔 기자들이 쓴 기사에 덧붙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작업은 결실을 맺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내 능력 부족. 하지만 회사에서도 굳이 그 쪽에 인력이나 물질적인 투자를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휘발성 강한 기사를 에버그린 콘텐츠로 만들려면 

어제 사람들과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그 때 생각이 떠올라 괜히 울컥했다. 내가 앞으로 하고픈 것이 그런 작업이다. 앞에서 소개한 주부가 했던 것 같은 작업. 무수히 흩어져 있는 텍스트 속에서 콘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작업.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해보고픈 작업이다.

뉴욕타임스는 혁신보고서에서 에버그린 콘텐츠 얘기를 자주 한다. 자기네 신문이 수 백 년 동안 쌓아놓은 훌륭한 콘텐츠를 잘 패키지화하면 뛰어난 에버그린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도 했다.

우리 IT 언론을 한번 돌아본다. 기사를 참 열심히 쓰는 데, 정작 ‘에버그린 콘텐츠’라고 할만한 것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매일 매일 소비하고 나면 그만인 기사들이 많다.

자, 이런 상황에서 에버그린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한번 따져보자. 애플이 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그럼 모든 기사들이 아이폰이 잘 팔렸고, 아이패드는 부진했다는 등의 기사를 쓴다. 삼성은 어닝 쇼크인데, 애플은 활짝 웃었다는 훌륭한 기사도 있다. 그 지점에서 끝이다.

한번 따져보자. 만약 2년 치 애플 실적 자료를 잘 정리해놨다면? 더불어 IDC 같은 시장 조사업체들이 발표한 분기별 스마트폰 판매 추이 같은 자료도 갖고 있다면? 더불어 애플과 삼성의 단말기 평균판매가격 추이 같은 것들도 있다면? 그것만 갖고도 시장의 흐름을 짚어주는 훌륭한 기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어제 CMS 얘기를 하면서, 내가 궁금했던 건 이런 부분이었다. 멋진 디지털 스토리텔링 기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상적인 자료들을 CMS를 통해 쉽게 불러올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일선 기자들은 좀 더 생명력이 긴 기사, 시장의 맥락을 좀 더 진지하게 짚어주는 기사를 쉽게 써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TheVerge나 Re/Code 같은 신생 명품 IT 사이트를 보면서 부러운 게 바로 그 부분이다. 쏟아지는 텍스트를 콘텍스트로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시대에 필요한 데이터 저널리즘과 디지털 스토리텔링 

난 2003년 ‘인터넷신문과 온라인 스토리텔링’이란 책을 쓰면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승부처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만 어떤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할 것이냐는 부분에 대해선 생각이 좀 달라졌다.

뉴욕타임스의 ‘스노우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몇몇 신문들이 선보이는 화려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기사? 당연히 훌륭하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은 가난한 인터넷 언론사들에겐 ROI가 너무 안 나온다. 데이터 저널리즘도 마찬가지다. 몇날 며칠 노가다를 하면서 데이터를 찾아내는 것. 훌륭하고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작업이긴 한데, ROI가 생각처럼 안 나온다는 게 함정이다.

그럼 어떤 걸 해야 할까? 내가 모범으로 생각하는 건 앞에서 소개한 주부 같은 작업이다. 매일 매일 쏟아져나오는 자료들을 맥락화해주는 작업. 사소해보이는 자료들을 DB로 잘 정리해서 그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작업. 이게 ‘일회성 프로젝트’보다는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통신사를 비롯한 주요 IT기업들은 매일 엄청난 자료를 쏟아낸다. 거기엔 각종 판매실적을 비롯해 가격 동향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그 대부분은 기사에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버려진다. 아니면 대충 한번 인용하고 만다.

이 대목에서 발상을 한번 바꿔보자. 그 자료들을 꼼꼼하게 정리를 한다면? 아니 꼼꼼하게 정리할 것도 없다. 그냥 분류라도 잘 해서 담아놓는다면? 그게 체계적으로 분류만 잘 돼 있고, 시각화만 제대로 돼 있다면 엄청난 자산이 되지 않을까? 어느 순간 물가지수의 토대가 됐던 한 주부가 했던 것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분류하고 정리한 자료를 CMS와 잘 연동해 놓는다면? 그래서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곧바로 불러올 수 있다면? 바쁘게 움직이는 기자들도 흐름을 짚어내는 기사를 좀 더 수월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에버그린 콘텐츠.’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고. 관점만 조금 바꾸면, 그리고 누군가 깃발만 제대로 꼽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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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성 기사 시대, ‘에버그린 콘텐츠’는 힘든 걸까?”에 대한 1개의 댓글

  1. 핑백: ‘에버그린 콘텐츠’에 대한 어설픈 단상 (2) | Hyper/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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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엔트리는 7월 25, 2014에 님이 Media, Tech에 게시하였으며 , 태그가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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