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혁신의 선구자 ‘길보드 차트’


한 때 길보드 차트란 말이 유행한 적 있었다. 길과 미국 빌보드사가 운영하는 팝 뮤직 차트인 빌보드차트의 합성어다. 길보드 차트란 이를테면 영등포 역앞 같은 곳에 있는 음반 리어카 노점상에서 자주 불리는 음악 순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길보드 차트’에 올라야 히트곡이 될 수 있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의 척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길보드차트의 위세는 대단했다. 도심지를 무심코 지나치던 많은 사람들은 리어카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음악 리듬에 어느 새 익숙해지게 된다. 그 자리에서 음반을 사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곳에서 정보를 획득한 뒤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 신청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길보드차트에서 히트한 뒤 제도권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도 적지 않다.

(여기서 참고삼아 한 가지. 1980년대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홀로 서기’란 시집이 있었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시는 대구지역 다방에서 입소문을 탄 뒤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느닷없이 길보드 차트 얘기를 왜 꺼낸 걸까? 곰곰 따져보면 ‘길보드차트’는 콘텐츠 혁신이란 관점에서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내 나름대로 그 시사점을 분석해보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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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방식 혁신: 패키지 주도권 이동   

여기서 잠시 옆으로 새어보자. 한 때 고등학교 스타급 야구 선수를 둘러싼 스카우트 분쟁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대개는 선수는 A대학을 가고 싶은 데, 학교에선 B대학으로 보내려고 하면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언뜻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가고 싶은 대학 가겠다는 데 왜 학교에서 방해를 하지? 란 의문이 제기됨직 하다. 그런데 여기엔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당시 대학들은 스타급 선수를 확보하기 위해 ‘끼워받기’ 미끼를 던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가능하면 많은 졸업생을 대학에 진학시켜야 하는 고등학교 입장에선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 그런데 스타급 선수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문제가 커진다. 동급생 몇 명이 대학에도 못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만 있었던 건 아니다. 스카우트 비용 관련 분쟁도 심심찮게 있긴 했다.)

이런 관행이 불합리해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시선을 조금을 넓히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행이다. 이를테면 신문. 보통 종이신문을 한 부 사면 기사를 몇 건이나 읽는가? 열혈 독자들이야 1면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겠지만 나머지 독자들은 거의 머릿 기사나 눈에 띄는 기사 몇 개만 본다. 나머지는 다 덤이다.

음반은 어떤가? 마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음반 한 장에서 관심을 갖는 곡은 몇 개 안 된다. 기껏해야 한 두 곡 정도? 음반회사 입장에선 간판급 한 두 곡을 앞세워 음반 한 장을 통째로 판매해 왔다.

2000년대들어 아날로그 음반 시장이 몰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 음반 판매구조가 전형적인 ‘끼워팔기 방식’이었던 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아이튠스로 대표되는 디지털 음반은 아날로그 시장의 이런 약한 고리를 파고 들었다.

그런데 1970년대와 1980년대 길보드 차트는 패키지 구조 탈피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히트곡 모음 형식으로 된 싸구려 테이프가 바로 그것이다. 음반회사들이 만든 제품에 비해 외형적인 품질은 떨어졌지만, 대신 고객 취향을 잘 반영한 ‘모음곡’이란 특징이 있었다. 낯선 곡을 듣는 대신 원하는 곡만 한 데 모아서 들을 수 있다는 이점은, 음반 마니아가 아닌 대중들에겐 매력 덩어리였다.

길보드 차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히트곡 모음’의 등장을 ‘패키지 구성 패러다임 변화’로 해석할 순 없을까? 생산자보다는 소비자들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새로운 패키지 상품의 등장. ^^

생산방식 혁신: 데이터 분석 토대로 한 최적의 패키지 구성 

음성적으로 제작된 음반들은 자기네들끼리 경쟁했다. 이 때 경쟁 포인트는 뭘까? 이를테면 ‘팝 히트곡 20선’이란 테이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 어떤 곡을 넣을 지는 ‘엿장수 마음’에 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상품을 잘 팔아먹으려면 ‘제품 구성’을 잘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히트곡 모음’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객 취향 분석’의 맹아가 싹텄다고 하면 지나친 논리 비약일까? 물론 요즘 얘기되는 빅데이터 분석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어떤 곡들을 모아야 가장 많은 고객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선 나름대로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도 영등포 역 앞 같은 곳에 있던 리어카 노점상에서 음반을 살 때 내 취향을 가장 잘 반영한 패키지를 골랐던 기억이 있다.

유통 혁신: 가격 거품 제거, 그리고 입소문 마케팅  

하지만 당시 길보드 차트의 가장 큰 경쟁 포인트는 역시 가격이었다. 정품 앨범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명품을 중시하는 고객들이야 코방귀를 끼겠지만, 일반 서민 특히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들에겐 나름 매력적인 구조였다.

물론 당시 길보트 차트에서 유통된 음반은 대부분 불법 복제품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가격 거품을 제거했다기 보다는, 부당 이득을 취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당시엔 저작권 개념이 약할 때란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들은 생산 설비를 대폭 간소화하면서 필요 이상의 고품질을 지향하기보다는 ‘대량 생산’을 토대로 한 저가 구조 확립 쪽에 더 공을 들였다.

길보드 차트를 주도한 노점상들의 유통 혁신은 또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 있던 장벽을 최소화했다. 그냥 바로 옆에서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게다가 이들은 고객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인기곡들을 반복해서 털어줬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입소문 마케팅을 할 수 있었다.

길보드 차트의 아련한 추억 속에 담긴 인사이트

요즘도 가끔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리어카 위에 난삽하게 전시돼 있는 싸구려 음반을 고르던 추억.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당시 길보드 차트를 주도했던 판매상들은 21세기 디지털 파괴자들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들은 전통적인 생산, 판매, 유통 방식을 과감하게 혁신했다. 물론 그 혁신이란 것이 대부분은 전통 질서 내에서 뿌리내릴 수 없는 취약한 수익 구조 때문에 나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들이 했던 방식 중 상당수는 불법의 영역에 가깝긴 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곰곰 따져보면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혁신 유전자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 유전자를 섭취하는 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또 다른 특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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