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도 침묵의 나선이 작동한다고?


SNS 공간에서도 ‘침묵의 나선이론’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여론조사 및 미디어 연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성인 18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퓨리서치센터는 이번 조사에서 에드워드 스노든의 NSA 불법 사찰폭로 건을 소재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NSA 사찰 문제는 이전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이 비교적 팽팽하게 맞섰던 사안이란 점을 감안했다고 퓨리서치센터는 밝혔다.

조사 결과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단 핵심 쟁점을 한번 정리해보자.

  • 스노든-NSA 건에 대해선 SNS보다 대면 토론 의향이 더 높았다. 사찰 관련 대화를 ‘얼굴 맞대고’ 할 용의가 있다는 응답은 86%였다. 반면 SNS에서 관련 토론을 하겠다는 의향을 드러낸 사람은 42%에 불과했다.
  • 소셜 미디어는 대안 플랫폼 역할을 못하고 있다. ‘대면 토론’ 않겠다고 응답한 14% 중 페이스북 등에서 토론할 의향 있다고 밝힌 것은 0.3% 불과.
  • 사람들은 자기와 의견이 통하는 사람과 좀 더 의견을 많이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도 그랬다.
  • ‘침묵의 나선’ 이론이 소셜 미디어에서도 적용. 스노든-NSA 사찰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과 관련 의견을 공유하겠다는 응답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두 배 가량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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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에 ‘침묵의 나선’이 적용되는 까닭은?

침묵의 나선이론은 독일 학자인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이 1966년 발표한 학설이다. 특정한 의견이 다수 사람들에게 인정되고 있다고 믿을 경우 반대 의견을 가진 소수 사람들은 침묵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게 이 이론의 핵심 논지다.

노이만은 ‘침묵의 나선이론’이 네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증폭된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위키백과를 조금 참고했다.

  • 권력자가 주목되지 않았던 화제를 꺼낸다.
  • 이 화제에 대해서는 곧바로 반대 의견을 꺼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은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이후 나오는 비판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는 비판이 가해지면서 배제된다.
  • 소수파가 된 비판세력은 다수의 위세에 눌려 비판을 포기한다.

‘침묵의 나선이론’은 각종 단체의 기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소중한 원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 동안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침묵의 나선이론이 기본 진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조사 결과 ‘대안 플랫폼’으로 기대를 모았던 소셜 미디어에서도 이 기제가 그대로 작동한다는 것이 퓨리서치센터 연구의 기본 골자다.

퓨리서치센터 보고서를 다 읽진 못했다. 앞에 있는 요약부분만 간단하게 읽어봤다. 읽으면서 “이게 언론이 호들갑을 떨 정도로 대단한 발견인가?”란 의구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밥 먹으면 배부른 것처럼 당연한 얘기”같은 생각이 든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난 가장 큰 이유는 ‘기록성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는 건 그 순간만 지나가면 그만이다. 설사 얼굴 붉히면서 대판 싸웠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러고 말면 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선 기록이 남는다. 이건 두고 두고 부담으로 남을 수도 있다. 특히 나처럼 ‘소심한 사람’들에겐 엄청난 압박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실제로 난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 반대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는 사람, 특히 ‘도저히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은 의견’을 피력해 올 경우엔 그냥 피해버린다. 굳이 빠득 빠득 싸우질 않는다.

소셜 미디어는 별천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결국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뤄진 공간이다. 그러니 기본 습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익명으로 글 내갈긴 뒤 도망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들의 기본 습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잊힐 권리’가 이슈인 요즘 같은 시대엔, 자기가 쓴 글이 그대로 기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누가 의견 다른 사람들과 악착같이 싸우려 하겠는가?

소셜 미디어의 진짜 문제는 ‘파편화 현상’ 아닐까

퓨리서치센터는 이번 보고서 말미에 ‘침묵의 나선이론’이 소셜 미디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그런데 난 이 부분도 좀 다르게 생각하는 편이다.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는 게 아니라 ‘공론의 파편화’가 심화된다고 봐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여기서 잠시 다른 학자 얘기를 한번 해보자. 박사 논문 준비할 때 캐스 선스타인이 쓴 [Republic.com 2.0]이란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에 나오는 몇 구절을 인용한다.

인터넷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는 데 훨씬 쉽기 때문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더 강화해주는 경향이 있다.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는 인터넷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에 따르면 인터넷은 특정 그룹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수월하게, 그리고 더 자주 숙의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대되는 관점을 듣지 않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난 선스타인의 이런 주장이 소셜 미디어에도 그대로 작동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침묵의 나선’이 문제가 아니라 ‘공론의 파편화’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다수의 위세에 눌려 침묵’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가진 다수가 몰린 곳’을 찾아 간다는 얘기다. 공간을 옮기는 게 쉽지 않은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선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준거집단으로 옮기는 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침묵의 나선’이란 관점으로 접근한 퓨리서치센터 연구 결과에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데, 더 불편한 건 이런 소식을 전하는 몇몇 매체들의 논조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역시나 ‘목소리 큰 일부’의 횡포(?)란 관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이란 칼럼 코너에 실린 ‘SNS 공간의 침묵의 나선’이란 칼럼이 대표적이다. 이 칼럼을 쓴 필자께서는 끝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다음 아고라나 일간베스트 같은 사이트를 보면 인터넷 공간에서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현상은 우리나라가 훨씬 더한 것 같다.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 김영오 씨의 단식을 지지하는 댓글 수백 개가 붙은 공간에서 김 씨의 행동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놓기란 쉽지 않다. SNS든 실제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아무리 SNS 시대라 해도 SNS 여론이 전체 의견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목소리 큰 일부에 대해 다수 국민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이 칼럼에 대한 논평은 생략한다. 다만, 저런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런 논리 전개를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목소리 큰 일부’와 ‘다수 국민’이란 분류는 어떤 근거로 나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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